
같은 XLPE 절연재를 쓰는데, 왜 어떤 해저케이블은 "물이 스며들어도 괜찮게" 설계할까요? 육상 케이블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이 발상은, 최근 10년 사이 해상풍력 시장이 만들어낸 실용적인 타협의 결과입니다. 이 새로운 설계를 어떻게 검증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바로 2018년 CIGRE WG B1.55가 발표한 TB 722, 정식 명칭 "6kV(Um=7.2kV)부터 60kV(Um=72.5kV)까지 해저케이블 추가시험 권고안"입니다.
지난 글의 TB 852가 800kV급 초고압 HVDC 케이블을 겨냥한 문서였다면, TB 722는 해상풍력 인터어레이 케이블(inter-array cable)에 초점을 맞춘 문서입니다. 전압은 낮지만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케이블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걸 아예 막지 않아도 되는가?"
① 왜 나왔나 — 원가 압력이 표준을 앞서간 사례
- 해상풍력 단지의 인터어레이 케이블은 터빈 대형화·단지 규모 확대에 따라 정격전압이 계속 상승, 최근 60kV(Um=72.5kV)급까지 확대되었습니다.
- 문제는 원가 절감을 위해 비전통적 차수구조(non-traditional water barrier)나 습식 절연(wet design) 케이블이 먼저 등장했고, 기존 IEC·CIGRE 문서가 이를 충분히 커버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 IEC 신표준(63026) 제정 과정에서 일부 사안은 CIGRE 권고안으로 별도 발행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나왔고, 그 결과물이 TB 722입니다.
② 핵심 축 — 건식(Dry) vs 습식(Wet) 설계
- 건식(Dry): 구리·알루미늄 코러게이트 시스 등 금속 차수층으로 수분을 원천 차단. 검증된 방식이나 구조 복잡·고원가.
- 습식(Wet): 별도 금속 차수층 없이 XLPE에 수트리 억제제(water tree retardant)를 배합해 수분 침투를 늦추는 방식. 구조는 단순해지지만 절연체가 장기간 물과 직접 접촉한다는 신뢰성 리스크를 안습니다.
- TB 722는 이 설계 구분에 따라 요구 시험 항목을 다르게 규정합니다.
③ TB 722가 추가한 신규 자격시험 7가지
설계에 따라 다음 항목이 신규 자격시험(Qualification Test)으로 요구됩니다. (+ 정기시험·설치 후 시험 범위도 함께 확대)
시험 항목 적용 설계 목적
| 가속 습식 노화시험 | 습식(Wet) | 장기 염수·전기 스트레스 하 절연 잔류내력 검증 |
| 충격시험 | 전체 | 운반·설치 중 충격 내구성 |
| 측면압력시험 | 전체 | 포설 중 옆방향 압력 저항성 |
| 용접부 기계적 특성시험 | 건식(Dry) 중심 | 금속시스 용접부 신뢰성 |
| 접착 접합부 노화시험 | 해당 구조 채택 설계 | 접착 구조 장기 내구성 |
| 내마모시험 | 전체 | 해저면 마찰 저항성 |
| 부속품 부식시험 | 전체 | 접속함 등 해수 환경 부식 저항성 |
④ 왜 "가속 습식 노화시험"이 핵심인가
- 습식 설계 케이블의 사실상 필수 승인시험. 절연체를 장기간 염수·전기적 스트레스에 동시 노출시킨 뒤 잔류 절연내력(residual dielectric strength)을 평가합니다.
- TB 852 글에서 다룬 논리와 동일하게, 절연 열화는 서서히 진행되는 메커니즘이라 짧은 시험으로는 잡히지 않습니다.
- 여기에 해수라는 변수가 더해집니다. 절연체가 운전 기간 내내 이온 확산 경로를 사이에 두고 해수와 마주하기 때문에, 단순 온도·전압 모델만으로는 열화 거동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 실제 실증 연구에서는 500Hz 교류를 인가한 상태로 염수 중 노화시킨 뒤 절연파괴시험을 진행하는 방식(Regime B 조건)으로 습식 설계 + 팩토리 조인트의 신뢰성을 검증한 사례가 보고되어 있습니다.
⑤ 한계 — 132kV급이라는 다음 숙제
- TB 722의 적용 범위는 6~60kV(Um=72.5kV)까지. 최근 논의되는 132kV급 어레이 케이블에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 132kV급에서는 수압, 염수 중 이온 확산 속도, 더 높은 전기적 스트레스·운전온도, 도체 부식 등 기존 시험조건이 반영하지 못한 변수가 새롭게 부각됩니다.
- 업계 리포트는 TB 722 시험절차의 132kV 확장을 위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TB 852 글에서 다룬 "표준이 산업 속도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
TB 722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게 순수 기술적 필요가 아니라 원가 압력이라는 산업적 동기가 표준 제정을 직접 견인한 사례라는 점입니다. 습식 설계라는 선택지가 먼저 시장에 나왔고, TB 722는 그게 안전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검증 체계로 뒤따라온 셈입니다. 컴파운드를 다루는 입장에서 보면 이 순서가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결국 습식 설계의 신뢰성은 절연체 자체보다도 그 안에 배합된 수트리 억제제의 장기 성능에 좌우되는데, 이건 설계도면 상의 스펙이 아니라 원료 로트별 편차, 압출 조건, 가교 후 잔류 부산물 관리 같은 지극히 실무적인 변수들이 결과를 가릅니다. 육상 케이블의 반도전 컴파운드 이슈를 다뤄본 경험에 비춰보면, 수트리 억제제도 결국 "스펙상 문제없음"과 "현장 20~30년 실운전에서 문제없음"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TB 722가 요구하는 가속 습식 노화시험은, 설계 검증인 동시에 컴파운드 공급망 전체에 대한 품질 게이트로 기능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뜨거운 감자인 132kV급 어레이 케이블 이슈는 지금 TB 722가 처음 만들어질 때와 정확히 같은 국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원가·용량 압박 때문에 전압은 먼저 올라가고, 표준은 늘 그 뒤를 쫓아갑니다. 다음 개정판이 나온다면 132kV급 습식 설계의 가속 노화시험 조건 확장이 핵심 화두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이고, 특히 압력·이온 확산 속도처럼 얕은 수심용 기준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변수들이 새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흐름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해상풍력 어레이 케이블용 컴파운드를 준비하는 제조사라면 지금부터 132kV급 조건에서의 예비 데이터를 축적해두는 편이 유리하다고 봅니다. 실제 CIGRE Session에서는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표준이 확정된 뒤 뒤늦게 데이터를 만들기 시작하면, 인증 일정 자체가 프로젝트 지연의 병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압대가 올라갈수록 수트리 억제제의 장기 성능이 더 엄격하게 검증받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이건 결국 소재 개발 단계에서부터 준비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격차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 글은 공개된 국제 표준 문서 및 업계 리포트를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참고문헌
- CIGRE Working Group B1.55, Technical Brochure 722: Recommendations for additional testing for submarine cables from 6 kV (Um = 7.2 kV) up to 60 kV (Um = 72.5 kV) (2018). — 해상풍력 어레이 케이블 추가시험 전반을 규정하는 CIGRE 공식 기술 브로슈어. https://www.e-cigre.org/publications/detail/722-recommendations-for-additional-testing-for-submarine-cables-from-6-kv-um72-kv-up-to-60-kv-um-725-kv.html
- CIGRE Academy Webinar, "Recommendations for additional testing for submarine cables from 6 kV up to 60 kV," presented by M. Jeroense (WG B1.55 convener), G. Clasen. — TB 722의 신규 자격시험 항목을 설명한 공식 웨비나 자료. https://www.cigre.org/article/GB/events/cigre-academy-webinars/recommendations-for-additional-testing-for-submarine-cables-from-6-kv-um--72-kv-up-to-60-kv-um--725-kv
- OWA Hi-VAS Summary Report WP9, "132 kV array cable" (2023), Carbon Trust / Offshore Wind Accelerator. — 132kV급 어레이 케이블로의 시험 확장 필요성과 기존 표준(TB 722, TB 623, TB 862)의 적용 한계를 다룬 업계 리포트. https://www.carbontrust.com/sites/default/files/documents/resource/public/OWA_Hi-VAS_Summary-Report_WP9_v2(f)_20230314.pdf
- SINTEF, "Performance evaluation and failure mode analysis of a long-term ageing test on HV submarine cables with tree-retardant XLPE insulation and factory joints." — TB 722 기준 가속 습식 노화시험(Regime B)을 팩토리 조인트 포함 케이블에 적용한 실증 연구.
- Mazzanti, G., "HVDC Cable System Testing," High Voltage, Wiley (2025). — CIGRE 케이블 시험 브로슈어 체계 전반(TB 852 등)을 리뷰하며 가속열화시험의 이론적 배경을 설명한 논문.
- CIGRE, "Submarine cables, there's power under water!" (Marco Marelli, SC B1 Chair). — CIGRE SC B1의 해저케이블 관련 기술 브로슈어 계보(TB 490, TB 722, TB 773 등)를 정리한 기고문. https://www.cigre.org/share/article/6005/submarine-cables-theres-power-under-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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