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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Cable)

"폐케이블 언제까지 묻을 것인가?" 재활용 방식이 바꿀 케이블의 미래

by 케이블 닥터 2026. 7. 27.

 

전선 산업에 남아있는 마지막 선형경제 조각

에너지 전환과 그리드 확장이 가속화되면서 전력·통신 케이블 수요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만큼 폐케이블도 함께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케이블 재활용은 오랫동안 구리·알루미늄 같은 금속 도체 회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도체를 감싸는 절연재·피복재(플라스틱)는 케이블 전체 중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함에도, 대부분 소각되거나 매립되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채굴 → 생산 → 폐기'로 끝나는 선형경제 구조가, 케이블 산업에서는 유독 오래 남아있었던 셈입니다.

 

이제 이 구조를 흔드는 압력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EU의 에코디자인 규정(ESPR)처럼 재활용 원료 함량을 요구하는 국제 규제가 확산되고 있고, 국내에서도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통해 전선 품목에 재활용 의무가 부과되고 있습니다. 소재 순환은 이제 '환경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시장 접근권 자체를 좌우하는 조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케이블 소재 순환경제의 두 갈래 — PCR과 PIR

케이블용 플라스틱 소재를 순환시키는 접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둘은 원리도, 다루는 대상도, 해결하는 문제도 다릅니다.

 

① PCR(Post-Consumer Recycled) — 물리적 분쇄 기반 재활용

수명이 다해 폐기된 케이블(Post-Consumer, 즉 이미 시장에 나가 사용되고 회수된 폐케이블)의 플라스틱 부분을 선별·분쇄해 원료로 재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원리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 폐케이블에서 금속을 분리한 뒤 남은 폴리에틸렌(PE) 계열 소재를 잘게 갈아, 신재(virgin resin)와 일정 비율로 배합해 다시 압출용 원료로 씁니다.

  • 장점: 공정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이미 상용화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 한계: 가교되지 않은 일반 PE(자켓재 등)에는 잘 맞지만, 가교된 XLPE(절연재)에는 이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XLPE는 한 번 가교(경화)되면 열을 가해도 다시 녹지 않는 열경화성(Thermoset)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② De-crosslinking(탈가교) — 화학적 재활용, PIR의 핵심 기술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게 탈가교(De-crosslinking) 기술입니다. XLPE의 가교 결합만 화학적으로 선택적으로 끊어내, 다시 열가소성(재용융 가능) 상태로 되돌리는 방식입니다.

 

학계에서는 초임계 유체(supercritical fluid), 특히 초임계 메탄올이나 알코올을 이용해 가교점만 분해하고 폴리에틸렌의 주쇄(backbone) 구조는 그대로 보존하는 연구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습니다. 기존의 열분해(Pyrolysis) 방식이 폴리머를 왁스 수준까지 열화시키는 것과 달리, 이 방식은 상대적으로 원래 물성에 가까운 형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 핵심 차별점입니다.

 

이 기술이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다루는 대상이 시장에 나갔다가 돌아온 폐케이블만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PIR(Post-Industrial Recycled) — 즉 제조 공정 중에 발생하는 스크랩, 불량품까지 재활용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이 이 기술의 진짜 활용 가치입니다.

 

실무에서 가장 절실한 건 사실 'PIR'입니다

여기서 업계 현실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두 방향 모두 장기적으로는 병행되어야 하지만, 제 경험상 실제 케이블 제조 현장에서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건 PIR, 즉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불량품의 재활용입니다.

 

실제로 압출 라인을 들여다보면, 규격을 살짝 벗어난 스크랩이 생각보다 자주 나옵니다. 이 블로그에서 다룰 두께 편차 트러블슈팅 사례나 외부반도전 압출량 문제 같은 케이스도, 결국 그 라인에서 나온 불합격 구간은 전부 스크랩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원인을 찾아 공정을 고친 뒤에도, 이미 뽑혀 나온 불량 구간의 XLPE 자체는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가교된 소재라 다시 녹일 수도 없고, 결국 저가치 충전재로 분쇄하거나 폐기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이런 스크랩 더미를 볼 때마다, 원료비만큼의 손실이 그대로 쌓여 사라진다는 게 늘 아쉬웠습니다.

이유를 조금 더 구조적으로 짚어보면 이렇습니다.

  • 불량은 예상보다 자주 발생합니다. 압출 공정에서는 두께 편차, 표면 결함, 압출량 불안정 등으로 인해 규격을 벗어난 스크랩이 꾸준히 나옵니다.
  • XLPE 스크랩은 지금까지 사실상 '버리는 수밖에 없는' 자원이었습니다. 가교된 소재라 재용융이 안 되니, 기껏해야 분쇄해서 저가치 충전재로 쓰거나 폐기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원료 투입 대비 손실률이 고스란히 비용으로 남는 구조입니다.
  • PIR 소재는 품질 관리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폐케이블(PCR)은 수십 년간 현장에서 사용되며 오염·열화된 상태로 회수되는 반면, 제조 중 발생한 불량 스크랩(PIR)은 애초에 품질이 관리된 환경에서 나온 소재라 오염도가 낮고, 원료 이력도 추적 가능합니다. 탈가교 이후 물성 재현성을 확보하기에 훨씬 유리한 조건인 셈입니다.

즉 De-crosslinking 기술을 PIR에 우선 적용하면, 버려지던 자원을 회수해 원가를 절감하는 동시에, 규제가 요구하는 재활용 실적까지 동시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게 지금 업계가 이 기술에 주목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두 축을 함께 가져가야 하는 문제

PCR과 PIR(De-crosslinking)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자원을 커버하는 보완 관계입니다.

구분 PCR PIR(탈가교)
재활용 대상 수명이 다해 회수된 폐케이블 제조 공정 중 발생한 불량/스크랩
적용 소재 주로 비가교 PE (자켓재 등) 가교된 XLPE (절연재)
소재 상태 오염·열화 가능성 있음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이력 추적 용이
현재 시급성 규제 대응 관점에서 중장기 과제 제조사 입장에서 당장의 원가·폐기물 이슈

장기적인 순환경제 완성을 위해서는 시장에 나간 폐케이블(PCR)까지 회수하는 체계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제조사 입장에서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이익은 PIR 쪽에서 먼저 나옵니다. 두 기술을 함께 발전시키는 기업만이, 강화되는 국제 규제와 원가 압박이라는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풀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인 전망

제 생각에는 앞으로 수 년 내로 XLPE PIR 재활용이 초고압 케이블 제조사들 사이에서 사실상의 표준 공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PCR은 회수 물류, 오염도 편차, 인증 체계까지 갖춰야 해서 산업 전체가 함께 움직여야 완성되는 영역인 반면, PIR은 개별 제조사가 본인 공장 안에서 당장 의사결정을 내리고 도입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원자재 가격 변동성이 큰 시기에는, "폐기 비용을 아끼는 동시에 재활용 실적도 쌓는" PIR 쪽이 투자 대비 회수가 훨씬 빠르게 체감될 겁니다. 다만 이게 PCR의 중요성이 낮다는 뜻은 아닙니다. 결국 규제가 요구하는 최종 재활용 목표치는 PCR 없이는 채울 수 없는 수준일 거라, PIR로 먼저 기술적 역량과 설비 투자 명분을 확보한 기업이, 이후 PCR 체계 구축에서도 유리한 출발선에 설 거라고 예상합니다.

 

본 글은 케이블 산업의 소재 순환 기술 동향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내용이며,

특정 기업의 제품이나 공정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1. Regulation (EU) 2024/1781, 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 (ESPR). — 지속가능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의 법적 근거와 재활용 원료 함량, 탄소발자국 등 요구사항을 규정한 EU 공식 법령. https://www.iea.org/policies/25028-eu-ecodesign-regulation
  2. "ESPR: EU Ecodesign Regulation Guide (2026)," Complir. — ESPR의 적용 범위 확대, 시행 일정, 성능요건 체계를 정리한 가이드. https://www.complir.io/resources/guides/espr-ecodesign-regulation-explained
  3. "The EU ESPR explained: What manufacturers need to know," Inriver. — 제조업체 관점에서 ESPR 준수를 위해 필요한 절차와 일정을 설명한 자료. https://www.inriver.com/resources/eu-espr-explained/
  4.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한국환경공단. — 국내 자원재활용법에 근거한 생산자 재활용 의무 제도의 법적 근거와 운영 체계 설명. https://www.keco.or.kr/group07/lay1/S302T848C859/contents.do
  5.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란,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 — EPR 제도의 주체별 역할과 이행 절차를 다룬 공식 안내자료. http://www.kora.or.kr/epr/epr.do
  6. Goto, T. et al., "Evaluation of Recycling Technology of Insulation of Cross-linked Polyethylene Insulated Cable using Supercritical Alcohol," IEEJ Transactions on Power and Energy. — 초임계 알코올을 이용한 XLPE 케이블 절연재의 탈가교 재활용 기술을 실증한 연구.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4664473/
  7. Baek, B.K. et al., "Continuous Supercritical Decrosslinking Extrusion Process for Recycling of Crosslinked Polyethylene Waste," Journal of Applied Polymer Science. — 초임계 메탄올 기반 연속식 탈가교 압출 공정을 다룬 연구.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65556442
  8. "Thermoplasticizing Technology for the Recycling of Crosslinked Polyethylene," ResearchGate. — XLPE의 열가소성 재전환을 위한 다양한 재활용 기법(분말충전, 초임계유체, 열분해 등)을 비교한 리뷰.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42697636
  9. "XLPE: Crosslinking Techniques and Recycling Process," Springer Nature Link. — XLPE의 가교 기술과 재활용 공정 전반을 정리한 학술 챕터.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07/978-981-16-0514-7_7
  10. Lee, H-S. et al., "Recycling of Crosslinked Polypropylene and Crosslinked Polyethylene in Supercritical Methanol," Korean Chemical Engineering Research. — 초임계 메탄올 조건에서의 XLPE/XLPP 탈가교 반응속도와 겔 함량 변화를 정량 분석한 연구.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63361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