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저케이블 하나가 실제로 바다 밑에 깔리기까지, 대체 몇 개의 국제표준을 통과해야 할까요? 지난 몇 편에 걸쳐 CIGRE와 IEC의 해저케이블 관련 핵심 문서 6편을 하나씩 뜯어봤습니다. 오늘은 이 6편을 한자리에 모아, 각 문서가 서로 어떻게 역할을 나눠 갖고 있는지 전체 그림을 정리해봅니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
6개 문서는 각자 다른 전류·전압대, 다른 케이블 종류를 다루지만, 결국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수렴합니다. "바다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이 케이블이 정말 수십 년을 버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전기적 관점(절연 성능), 기계적 관점(포설·운동 내구성), 그리고 설계 철학 관점(습식이냐 건식이냐, AC냐 DC냐)에서 각각 따로 규정한 것이 이 6편의 문서입니다.
한눈에 보기 — 6편 요약표
| 문서 | 발행연도 | 적용범위 | 핵심 초점 |
| TB 852 | 2021 | HVDC, ~800kV | 압출형 DC 케이블 시스템의 사전인증시험(PQ), 열안정성시험, 임시과전압시험(TOV) |
| TB 722 | 2018 | 6~60kV (Um=72.5kV) | 해상풍력 인터어레이 케이블의 습식(Wet) 설계 신규 자격시험 |
| IEC 63026 | 2019 | 6~60kV (Um=72.5kV), 수심 250m까지 | MV 해저케이블 시험의 기본 골격(전기·물성·기계) + 카테고리 A/B/C 선정 가이드 |
| TB 623 | 2015 | AC/DC 전압 구분 없음 | 포설·운반 단계의 기계적 취급(장력, 굽힘, 압착) 시험 전담 |
| TB 490 | 2012 | AC, 30(36)~500(550)kV | EHV급 AC 해저 수출케이블의 전기시험, 특히 조인트 검증 강화 |
| TB 862 | 2022 | 부유식 해상풍력 동적케이블 | 반복 운동 하중에 대한 전신피로시험 등 동적 전용 기계시험 |
전류 종류·전압대로 보면 이렇게 나뉩니다
- HVDC, ~800kV — 육상·해저 공용의 초고압 직류 송전케이블: TB 852
- MV(중전압) AC, 6~72.5kV — 해상풍력 인터어레이 케이블: TB 722 + IEC 63026
- EHV(초고압) AC, ~500(550)kV — 육지-섬 연계, 해상변전소-육지 수출케이블: TB 490
여기에 기계시험은 전류 종류·전압대와 무관하게 TB 623이 공통으로 적용되고, 부유식이라는 특수 조건에서는 TB 862가 별도로 얹힙니다. 흥미로운 건 TB 852조차 순수 HVDC 전용 문서가 아니라 육상·해저 케이블을 함께 다룬다는 점입니다. 다만 DC 쪽도 완전히 단일 문서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TB 852는 압출형(extruded) DC 케이블을, 별도의 TB 853(2021)은 깊은 해저에서 여전히 쓰이는 랩드형(lapped) DC 케이블을, TB 622(2015)는 두 방식을 잇는 전환접속재(transition joint)를 각각 전담합니다. 즉 AC 계열(TB 722·IEC 63026·TB 490)이 전압대를 기준으로 세분화된다면, DC 계열은 케이블의 절연 구조(압출형/랩드형) 기준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셈입니다.
"정적(Static)"과 "동적(Dynamic)"이라는 또 하나의 축
TB 852, TB 722, IEC 63026, TB 490, TB 623까지 다섯 편은 모두 해저면에 고정된 정적 케이블을 전제로 합니다. 반면 TB 862는 부유식 해상풍력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조건, 즉 케이블이 평생 움직인다는 전제를 다룹니다. 이 축을 기준으로 다시 나누면 이렇습니다.
- 정적 케이블: TB 852, TB 722, IEC 63026, TB 490 (전기적 관점) + TB 623 (기계적 관점, 포설 시 일회성 하중)
- 동적 케이블: TB 862 (기계적 관점, 서비스 기간 내내 반복 운동 하중)
문서 간 역할 분담 — 경쟁이 아니라 보완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발견은, 이 6개 문서가 서로 겹치거나 경쟁하지 않고 철저히 역할을 나눠 가진다는 점이었습니다.
- IEC 63026은 MV급 해저케이블의 "기본법"이고, TB 722는 그중 습식 설계처럼 IEC 63026이 다 담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는 "특별법" 역할을 합니다.
- TB 490(AC 전기)과 TB 852(DC 전기)는 전류 종류에 따라 축을 나누면서도, 조인트 수밀성이나 안전계수 기반 시험장력처럼 핵심 원칙은 서로 참조하며 공유합니다.
- TB 623은 AC·DC 구분 없이 기계시험 전반을 전담하고, TB 862는 TB 623의 피로시험 개념을 물려받아 부유식이라는 새 조건에 맞게 확장한 후속편입니다.
즉 여섯 문서를 따로따로 읽으면 "왜 이렇게 표준이 많을까" 싶지만, 함께 놓고 보면 각자 자기 몫만큼만 규정하고 나머지는 다른 문서를 참조하도록 설계된, 꽤 정교한 분업 체계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공통적으로 발견된 한계들
시리즈 내내 반복해서 등장했던 비판 지점도 함께 정리해봅니다.
- 적용 범위의 공백: TB 722·IEC 63026은 132kV급 어레이 케이블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 한계값 표준화 미비: TB 623이 규정한 압축 한계값 산정 방식이 회사마다 제각각이라는 문제는, TB 862가 일부 보완했지만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습니다.
- IEEE 표준과의 정합성 문제: TB 852는 HVDC 케이블 신뢰성과 직결되는 IEEE 1732(공간전하 측정)·IEEE 2862(부분방전 측정)와의 정합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CIGRE 브로슈어 체계 전반이 관련 IEEE 표준과의 정합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개인적인 생각
여섯 편을 순서대로 정리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해저케이블 표준 체계가 "완성된 건축물"이라기보다는 "계속 증축 중인 건물"에 가깝다는 점이었습니다. TB 490(2012)이 EHV급 AC 전기시험으로 본채를 지었고, TB 623(2015)이 기계시험이라는 별채를 붙였고, 해상풍력이 커지면서 IEC 63026과 TB 722(2018~2019)가 MV급 전용 동을 새로 지었고, TB 852(2021)가 HVDC라는 또 다른 전류 체계의 동을 세웠고, 마지막으로 부유식 풍력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요구가 생기자 TB 862(2022)가 또 하나의 동을 얹은 셈입니다.
컴파운드 소재를 다루는 입장에서 이 흐름을 보면, 결국 앞으로도 이 건물은 계속 증축될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132kV급 어레이 케이블, 부유식 풍력의 기계-전기 복합 열화 메커니즘, HVDC와 IEEE 표준 간 정합성처럼 지금 이미 업계에서 거론되고 있는 공백들이 다음 개정판이나 신규 브로슈어의 소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재 개발자 입장에서는 표준이 완성되고 나서 뒤늦게 대응하기보다, 이런 논의가 오가는 지금 단계에서부터 관련 데이터를 축적해두는 게 결국 다음 세대 표준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리즈 다시 보기
- CIGRE TB 852 — 800kV까지의 압출형 DC 케이블 시스템 시험 권고안
- CIGRE TB 722 — 해상풍력이 만든 새로운 케이블, 새로운 시험
- IEC 63026 — 왜 CIGRE는 따로 TB 722를 냈을까
- CIGRE TB 623 — 해저케이블은 전기보다 기계가 더 무섭다
- CIGRE TB 490 — 전압이 오르면 조인트부터 의심하라
- CIGRE TB 862 — 바람에 흔들리는 터빈, 함께 흔들리는 케이블
본 글은 앞선 시리즈 6편의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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