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가교 재활용 수지는 왜 아직 '저가치' 소재에 머물러 있을까 — PCR·PIR 다음 과제

순환경제 논의가 한 단계 깊어지고 있다
케이블 산업이 탄소중립과 자원순환에 속도를 내면서, 재활용 원료를 다루는 논의도 점점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단순히 "재활용 원료를 썼다"는 수준을 넘어, 그 원료가 어디서 왔는지(PCR인지 PIR인지)를 명확히 구분해서 다루는 흐름이 뚜렷해졌습니다.
- PIR (Post-Industrial Recycled): 케이블 제조 공정 중 발생한 스크랩·불량품을 재용융해 재활용하는 방식. 공급이 안정적이고 품질 관리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중에 이미 풀린 폐플라스틱 문제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Scope 3(공급망) 탄소배출 저감 효과도 제한적입니다.
- PCR (Post-Consumer Recycled): 수명이 다해 회수된 전력망·통신선의 폐케이블 피복재를 원료로 되돌리는 방식. 매립을 직접적으로 줄이고, 전과정평가(LCA) 기준으로 가장 확실한 탄소저감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진정한 순환경제의 핵심으로 꼽힙니다.
이런 맥락에서 글로벌 유틸리티와 에코디자인 규제들도 이제 막연한 "재활용 원료 사용"이 아니라, 추적 가능한 PCR 소재에 대한 명시적인 최소 함량 기준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PCR을 고압 전력망 인프라에 안전하게 편입시키려면 회수·정밀 분리 과정의 기술적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탈가교(De-crosslinking) 기술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한계가 있다
여기까지는 업계에서 흔히 논의되는 내용입니다. 다만 실무를 들여다보면, 한 가지 잘 언급되지 않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상용화되어 있는 폐XLPE 탈가교 기술 대부분이, 사실 전선용 자켓 소재로 다시 쓰기엔 부적합한 수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탈가교의 한계
탈가교 처리를 마친 XLPE 수지를 보면, MI(Melt Index, 용융지수)가 상당히 높게 나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쉽게 말해 거의 유체처럼 줄줄 흐르는 상태의 수지가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건 기술이 미숙해서라기보다, 현재의 탈가교 방식이 가교점만 선택적으로 끊어내지 못하고, 고분자의 주사슬(backbone) 자체를 함께 무차별적으로 절단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주사슬이 짧게 끊어진 수지는 인장강도, 신율 같은 기계적 물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만들어진 재생 수지는 케이블 소재 중 물성이 중요한 용도로는 재투입되지 못하고, 결국 저가의 산업용 MI 조절제, 첨가제 캐리어, 안료 마스터배치용 원료 같은 낮은 가치의 용도로 소비되는 게 현재의 현실입니다. "재활용했다"는 명분은 채울 수 있어도, 정작 원래 있던 자리(케이블 소재)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셈입니다.
결국 '재활용률 숫자'와 '진짜 순환'은 다른 이야기다
여기서 짚고 싶은 건, 지금의 탈가교 기술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재활용했다"는 사실과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성과라는 점입니다. 저가의 MI 조절제나 안료 마스터배치용 원료로 소비되는 것도 분명 폐기보다는 나은 선택이고, 매립·소각을 줄이는 효과는 실재합니다. 다만 이게 규제가 요구하는 수준의 '고부가가치 순환'과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걸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지점이 앞으로 업계가 풀어야 할 실질적인 숙제라고 봅니다. 지금처럼 저가치 용도로만 소비되는 구조가 계속된다면, PIR이든 PCR이든 결국 "재활용률 숫자를 채우기 위한 재활용"에 머무를 가능성이 큽니다. 고분자 주사슬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가교결합만 다루는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해야, 탈가교 수지가 다시 케이블 소재 그 자체로 순환될 수 있는 진짜 의미의 순환경제에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격차를 얼마나 좁히느냐가, 향후 이 분야의 실질적인 경쟁력을 가르는 변수가 될 것 같습니다.
본 글은 케이블 산업의 소재 순환 기술 동향과 저자의 견해를 정리한 내용이며,
특정 기업의 제품이나 공정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 Goto, T. et al., "Evaluation of Recycling Technology of Insulation of Cross-linked Polyethylene Insulated Cable using Supercritical Alcohol," IEEJ Transactions on Power and Energy. — 초임계 알코올을 이용해 XLPE 케이블 절연재를 탈가교하고 물성을 평가한 실증 연구.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4664473/
- Okajima, I. et al., "Decomposition of Silane-Crosslinked Polyethylene with Supercritical Alcohol," Journal of Chemical Engineering of Japan. — 초임계 알코올 조건에서 실란 가교 폴리에틸렌의 가교결합 분해 메커니즘을 다룬 연구.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24345667_Recycling_of_insulation_of_600V_XLPE_cable_using_supercritical_alcohol
- Baek, B.K. et al., "Continuous Supercritical Decrosslinking Extrusion Process for Recycling of Crosslinked Polyethylene Waste," Journal of Applied Polymer Science. — 초임계 메탄올 반응온도·함량에 따른 탈가교율 변화와 겔 함량 감소를 정량화한 연구.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65556442
- Lee, H-S. et al., "Recycling of Crosslinked Polypropylene and Crosslinked Polyethylene in Supercritical Methanol," Korean Chemical Engineering Research. — 반응온도·초기 겔함량에 따른 탈가교 반응속도론(kinetics)을 비교 분석한 연구.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63361339
- "Thermoplasticizing Technology for the Recycling of Crosslinked Polyethylene," ResearchGate. — 분말충전, 열전단, 초임계유체 등 XLPE 열가소성 재전환 기법과 각각의 물성 한계를 비교한 리뷰.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42697636
- "XLPE: Crosslinking Techniques and Recycling Process," Springer Nature Link. — XLPE 가교 기술 원리와 재활용 공정 전반, 관련 선행연구를 정리한 학술 챕터.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07/978-981-16-0514-7_7
- "Recycling Method of Crosslinked Polyethylene," IntCo Recycling. — 분말충전 재활용, 열절단 재활용, 초임계유체 재활용 등 XLPE 재활용 방식별 원리를 비교 설명한 산업 자료. https://www.intcorecycling.com/Recycling-Method-Of-Crosslinked-Polyethylene.html
- Regulation (EU) 2024/1781, 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 (ESPR). — 재활용 원료 함량과 탄소발자국 등을 규정한 EU 공식 법령으로, 탈가교 기술이 만족해야 할 규제 목표치의 배경. https://www.iea.org/policies/25028-eu-ecodesign-regulation
-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한국환경공단. — 국내 전선 품목의 재활용 의무 체계를 규정한 제도 안내. https://www.keco.or.kr/group07/lay1/S302T848C859/contents.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