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다 만들었는데 판매 금지? 525kV HVDC 케이블의 운명(CIGRE TB 852)

케이블 하나를 실제 전력망에 투입하기까지, 왜 꼬박 1년 가까운 시간을 시험에만 써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국제전기기술위원회도, 개별 제조사도 아닌 CIGRE(국제대전력망회의)가 만든 하나의 문서에 담겨 있습니다. 바로 2021년 11월 CIGRE WG B1이 발표한 TB 852, 정식 명칭으로는 "800kV까지의 정격전압을 갖는 압출형 DC 케이블 시스템 시험 권고안"입니다.
이전 세대 표준(TB 219:2003, TB 496:2012)의 계보를 이어받으면서도 여러 부분을 새롭게 개정한 이 문서는, 지난 25년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압출형 HVDC 케이블 시장을 뒷받침하는 사실상의 업계 바이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TB 852가 실제로 어떤 단계의 시험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하나씩 뜯어보겠습니다.
1. 케이블 시험은 원래 여러 단계로 쪼개져 있다
TB 852는 케이블 시스템의 신뢰성을 검증하는 과정을 하나의 시험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목적이 서로 다른 여러 단계로 명확히 구분합니다.
- 개발시험(Development Test): 신규 설계·소재 단계에서 진행하는 초기 검증
- 형식시험(Type Test): 케이블 시스템의 설계와 제조가 표준 규격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시험. 전기적 시험뿐 아니라 IEC 62067 등에 따른 비전기적 물성 시험도 포함됩니다.
- 사전인증시험(Pre-Qualification Test, PQ): 형식시험을 통과한 케이블 시스템 중에서도, HV/EHV급에 한해 추가로 요구되는 훨씬 더 가혹한 시험. 실제 매설·시공 조건과 유사하게 설치한 뒤 진행하는, 오늘 다룰 "1년짜리 시험"이 바로 여기 해당합니다.
- 인증확장시험(Extension of Qualification): 이미 인증받은 시스템의 사양을 일부 변경했을 때, 처음부터 다시 PQ를 반복하지 않고 변경분만 검증하는 절차
- 정기시험(Routine Test): 양산되는 개별 제품마다 진행하는 검사
- 샘플시험(Sample Test) 및 설치 후 시험(After-Installation Test): 양산 이후, 그리고 실제 현장 설치 이후 단계에서의 검증
이렇게 단계를 나누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수조 원 규모의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케이블 시스템이 실패하면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한 번만 제대로 검증하면 끝"이 아니라 먼저 표준적인 형식시험으로 기본 설계·제조 품질을 확인한 뒤, HV/EHV급에는 한 단계 더 가혹한 PQ까지 추가로 요구하는 이중 안전장치를 만들어 둔 것입니다.
2. PQ 시험이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가
이 중에서도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바로 사전인증시험(PQ)입니다. TB 852가 규정하는 PQ 시험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 장기 인가전압 시험: 정격전압(U₀) 대비 약 1.45배에 해당하는 전압을 장기간 연속으로 인가합니다. 절연체가 실제 운전 조건보다 더 가혹한 스트레스를 오랜 시간 버텨내는지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 중첩 임펄스 시험: 장기 인가시험이 끝나면, 그 위에 낙뢰나 개폐 서지를 모사한 임펄스 전압을 추가로 걸어 절연체가 순간적인 충격에도 견디는지 검증합니다.
이 장기 인가시험이 왜 몇 주가 아니라 1년 단위로 설계되는가 하면, 절연체의 열화는 순간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기 트리처럼 서서히 진행되는 열화 메커니즘은 짧은 시험으로는 절대 잡아낼 수 없고, 실제 수십 년의 운전 기간을 압축해서 시뮬레이션하려면 그만큼의 누적 스트레스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원리는 이 블로그에서 다룬 아레니우스 수명예측 모델의 접근법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TB 852는 열안정성시험(Thermal Stability Test, TST)도 요구합니다. 절연체의 유전손실이 국부적인 온도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게 다시 손실을 키우는 악순환에 빠지면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온도 상승, 즉 열 폭주(Thermal Runaway)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시험입니다. (이 개념은 이 블로그에서 청정도를 다뤘던 글에서도 언급했던, DC 케이블 특유의 취약점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3. 최신 개정판의 새로운 특징 — 임시과전압시험(TOV)
TB 852가 이전 세대 표준(TB 496)과 가장 크게 달라진 지점 중 하나는 임시과전압(Temporary Overvoltage, TOV) 시험의 도입입니다.
최근 HVDC 시스템은 전압원컨버터(VSC) 방식이 대세가 되면서, 기존의 낙뢰·개폐 서지와는 성격이 다른 새로운 유형의 과전압 현상들이 관찰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상 운전 전압과 같은 극성으로 아주 느리게 상승하는 과전압, 그리고 반대 극성의 피크가 진동하듯 나타나는 과전압이 대표적입니다. TB 852는 이런 컨버터 특유의 과도현상까지 시험 범위에 포함시킴으로써, 실제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고 평가받습니다.
4. 완벽한 표준은 아니다 — 업계에서 지적하는 한계
다만 TB 852가 나오자마자 업계에서 곧바로 여러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TB 852가 "가능한 한 기존의 권고안, 표준, 관행에 기반한다"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HVDC 케이블 시스템의 신뢰성과 직결되는 두 국제표준 — IEEE 1732(550kV급까지의 공간전하 측정)와 IEEE 2862(800kV급 접속함 정기시험 중 VHF/UHF 센서 기반 부분방전 측정) — 와의 정합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이런 지적은 표준이라는 게 한 번 만들어지면 완결되는 게 아니라, 계속 논쟁하고 개정되며 진화하는 살아있는 문서라는 걸 보여줍니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TB 852만 맹신할 게 아니라, 관련 IEEE 표준까지 함께 참고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험 단계별 한눈에 보기
| 시험 종류 | 목적 | 대략적 소요기간 |
| 개발시험 | 초기 설계/소재 검증 | 수주~수개월 |
| 형식시험(Type Test) | 표준 규격 준수, 설계·제조 검증 | 수주~수개월 |
| PQ (사전인증) | HV/EHV급, 형식시험 통과 후 실환경 조건 추가 검증 | 약 1년 |
| 인증확장시험 | 기존 인증 대비 변경분만 검증 | 수개월 |
| 정기시험 | 양산품 개별 검사 | 시간~일 단위 |
개인적인 생각
이렇게 긴 시험 기간을 감수하면서도 업계가 TB 852 체계를 따르는 이유는, 결국 HVDC 케이블 프로젝트의 실패 비용이 시험 비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1년이라는 시간은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분명 부담스러운 원가 요소지만, 프로젝트 전체 관점에서 보면 그 1년이 수십 년의 무고장 운전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료에 가깝습니다. 사실 케이블은 한번 설치가 되면 최소 30년 이상은 사용이 되어야 하기에, 1년 이라는 시간동안 가혹한 조건에서 여러 평가를 거쳐서 그 안정성을 검증하는 것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VSC 기반 시스템이 계속 늘어나는 흐름 속에서 TOV 시험처럼 새로운 시험 항목이 계속 추가되는 방향과, IEEE 표준과의 정합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겹치면서, 다음 개정판에서는 시험 항목이 오히려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시험 기간을 단축하는 방향보다는, 정합성과 신뢰성을 우선시하는 쪽으로 계속 무게가 실릴 것 같습니다. 업계 입장에서는 원가·일정 부담이 늘어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런 보수적인 접근이 HVDC 케이블 시스템 전체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지키는 더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 글은 공개된 국제 표준 문서 및 학술 리뷰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참고문헌
- CIGRE Working Group B1.61, Technical Brochure 852: Recommendations for testing DC extruded cable systems for power transmission at a rated voltage up to and including 800 kV (2021). — HVDC 압출형 케이블 시스템 시험 전반을 규정하는 CIGRE 공식 기술 브로슈어.
- Mazzanti, G., "HVDC Cable System Testing," High Voltage, Wiley (2025). — TB 852/853을 중심으로 HVDC 케이블 시험 체계 전반(개발시험~설치 후 시험)을 리뷰한 논문. https://ietresearch.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049/hve2.70121
- "Critical Review of Cigrè Technical Brochure 852," IEEE Conference Publication (2023). — TB 852의 개선점과 한계(IEEE 1732/2862와의 정합성 부족 등)를 다룬 비평 논문.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10179051/
- S. Hou, Y. Zhao, et al., "Experimental practice implemented to improve meaningfulness of prequalification tests for extruded HVDC 525kV land and submarine cables," ISH 2021, Xi'an. — 525kV급 육상·해저 HVDC 케이블의 PQ 시험 실증 사례 연구.
- CIGRE UK, Webinar Tutorial: HVDC Cables, Technical Brochures 852 and more (2024). — TB 852의 열안정성시험(TST), 임시과전압시험(TOV) 등 세부 시험 항목을 설명한 CIGRE 공식 튜토리얼 자료. https://cigre.org.uk/web-cont1001/uploads/CIGRE-Tutorial-852-HVDC-Extruded-Cables-2024.pdf
- IEEE Std 1732-2017, IEEE Recommended Practice for Space Charge Measurements on High-Voltage Direct-Current Extruded Cables for Rated Voltages up to 550 kV. — HVDC 압출형 케이블(550kV급까지)의 공간전하 측정 방법을 규정한 권고안.
- IEEE Std 2862-2020, IEEE Recommended Practice for Partial Discharge Measurements under AC Voltage with VHF/UHF Sensors during Routine Tests on Factory and Pre-Molded Joints of HVDC Extruded Cable Systems up to 800 kV. — HVDC 압출형 케이블(800kV급까지) 접속함의 정기시험 중, VHF/UHF 센서를 이용한 부분방전 측정 방법을 규정한 권고안.
- "Testing and Qualification for Extruded DC Transmission Cable Systems," ELECTRA, CIGRE (2023). — 압출형 DC 송전 케이블 시스템의 인증 프로세스 전반을 다룬 CIGRE 기고문. https://electra.cigre.org/331-december-2023/technology-e2e/testing-and-qualification-for-extruded-dc-transmission-cable-system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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